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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조 후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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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조 후지코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태어난 귀족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측실이자 가네요시 친왕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니조 타메미치의 딸로, 섭정 관백가의 여관을 거쳐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 선지로서 궁궐에서 일했다. 와카에도 능하여 칙찬 가인으로 활동했으며, 겐코의 난 이후 출가하여 불문에 귀의했다. 가네요시 친왕과의 이별 후, 말년에 병으로 사망했으며, 임종 시 아들을 걱정하는 사세의 노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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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조 후지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조 후지코
다른 이름니조 도코
국적일본
작위일본국 국모 (명나라에서 받음)
신분종3위
존칭폐하
휘장(미상)
출생일에이닌 원년 (1293년) 이후 - 쇼안 2년 (1300년) 이전
사망일쇼헤이 6년/간노 2년 3월 29일 (1351년 4월 25일)
사망 장소(미상)
매장일(미상)
매장지영패: 히고국 고신지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시)
가족 관계
배우자고다이고 천황
자녀가네요시 친왕 (일본 국왕 요시카네)
가문후지와라 북가 미코히다리류 니조가
아버지니조 타메미치
어머니(미상, 아스카이 마사아리의 딸인 아스카이 츠네코?)
경력
직책니조간파쿠뇨보 (간파쿠 니조 미치히라의 뇨보)
주구센지 (주구사요지 기시의 필두 뇨보)
기타
종교(미상)
서명(미상)

2. 경력

니조 후지코는 초기에 섭관가 니조 미치히라를 모시는 여방으로 일했으며[4], 1319년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 사이온지 기시가 입궁하자 그녀를 모시는 선지가 되었다. 선지는 중궁을 보좌하는 최측근으로, 후지코는 가문 배경과 교양을 인정받아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1320년에는 와카 실력을 인정받아 『속천재화가집』에 작품이 실리며 칙찬 가인이 되었다.[6]

이후 고다이고 천황의 총애를 받아 1329년경 가네요시 친왕을 낳았으나[1], 중궁 선지로서의 역할은 계속 수행했다. 겐코의 난 발발(1331년) 무렵에는 이미 종삼위에 올라 있었다.[4] 1332년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 섬으로 유배되자, 세속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였다.

겐무 신정이 무너지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면서 1338년 아들 가네요시 친왕이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어 규슈로 떠나게 되면서 모자는 이별했다. 후지코는 교토에 남아 아들의 안녕을 빌며 지내다가 1351년 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8].

2. 1. 가계

니조 후지코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귀족인 좌중장 니조 타메미치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속한 고시사류 니조파는 유명한 가인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직계 후손 가문이다. 후지코의 할아버지인 니조 타메요 역시 당시 와카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후에 『신 후센 와카슈』와 『조쿠 센자이 와카슈』의 편찬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버지 타메미치는 할아버지 타메요의 적장자였고 와카 실력도 뛰어났으나, 가문을 잇기 전인 쇼안 원년(1299년) 5월 5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후지코는 빨라도 에이닌 원년(1293년), 늦어도 쇼안 2년(130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닌 원년(1293년)은 『마스카가미』에서 후지코의 오빠로 언급된 니조 타메사다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1] 14세기 말 기록인 『손비분묘쿠』에 따르면 후지코는 세 자매 중 맏딸이었다.

후지코의 친어머니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신 센자이 와카슈』에는 아버지 타메미치의 정실이었던 아스카이 쿄코 (아스카이 마사아리의 딸)와 주고받은 노래가 남아 있어,[2][3] 노래의 친밀한 내용으로 보아 아스카이 쿄코가 친어머니일 가능성이 있다.

후지코에게는 앞서 언급한 오빠 니조 타메사다 외에, 츠치미카도 마사나가와 결혼하여 츠치미카도 아키자네를 낳은 여동생 등이 있다.

2. 2. 전반생

『존비분맥』에 따르면, 후지코는 처음에 섭관가인 구조류 니조가여방(女房, 궁녀)을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섭관가의 니조가는 후지코가 속한 고사류 니조가와는 이름만 같고 다른 가문이다. 당시 니조 관백이 니조 미치히라였다면, 이는 1316년부터 1318년 사이의 일로 추정된다.[4]

이후 후지코는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정실)인 사이온지 기시1319년 9월 21일(겐오 원년 8월 7일) 중궁으로 책봉되자, 그녀를 모시는 선지가 되었다. 선지는 공가 사회 상급 여성 사용인인 여방 중 최상위 직책으로, 주군을 보좌하는 제1 비서와 같은 중요한 역할이었다. 특히 중궁 선지는 가문 배경, 지성, 실무 능력, 교양 등 모든 면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여성 중에서 선발되었다. 천황을 직접 모시는 여방을 '상의 여방'(공적 관직인 후궁 십이사 포함)이라 부른 반면, 중궁을 모시는 여방은 '궁의 여방'이라 불렀는데, 중궁 선지는 '궁의 여방'의 필두였다. 중궁 선지는 '상의 여방'의 필두인 전시와 협력하여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만, 일본사 연구자 스즈키 오리에에 따르면, 헤이안 시대 후기인 11세기 후반에는 중궁의 실무를 담당하는 중궁 어갑전(御匣殿)이 중궁 선지보다 지위가 높았다는 설도 있다. 가마쿠라 시대의 선지와 어갑전 서열은 명확하지 않지만, 두 직책 모두 중궁을 보좌하는 핵심적인 역할이었다.

중궁 선지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공경의 딸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후지코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 니조 타메미치를 잃었다. 또한 조정의 공적인 성격이 강한 '상의 여방'과 달리, '궁의 여방'은 중궁의 친정 가문에서 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사이온지 가의 차기 당주이자 중궁 대부였던 사이온지 사네히라는 니조 타메요의 딸이자 후지코의 숙모인 쇼쿤몬인 하루히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5], 이러한 인연으로 후지코가 발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후지코와 비슷한 시기에 중궁의 최고 간부로 입궐한 인물로는 중궁 어갑전을 맡은 사이온지 킨아키의 딸(어갑전, 후에 고다이고 천황의 첫째 황자 소료 친왕의 비)과 중궁 내시를 맡은 아노 렌시(후에 고다이고 천황의 측실이 되어 고무라카미 천황을 낳음)가 있었다.

이 무렵, 니조파 와카 가문의 적통이었던 후지코는 와카를 활발히 짓기 시작했다. 1320년(겐오 2년)에 편찬된 『속천재화가집』에 '중궁 선지'라는 이름으로 연애 노래 한 수가 실리면서(연애1·1056) 칙찬 가인이 되었다.[6] 또한 1322년 3월 1일(겐코 2년)에 완성된 『습유현조화가집』(편자는 불확실하나 사촌인 니조 타메아키로 추정됨)에도 세 수의 와카가 실렸다(19·261·486번).

2. 3. 가네요시 친왕 출산

후지코는 고다이고 천황의 총애를 받아 겐토쿠 원년(1329년)경 가네요시 친왕을 낳았다.[1] 고다이고 천황은 과거 황태자 시절, 후지코의 이모이자 니조파의 유명한 가인인 니조 타메코와 부부였으나, 타메코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2]

가네요시 친왕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쇼헤이 3년/조와 4년(1348년) 6월 23일자 고조 요리모토 문서("아소 가문 문서"『남북조 유문 규슈편 3권』2482)에 가네요시 친왕이 "성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모리 시게아키는 당시 "성인"이 만 20세 정도를 의미한다고 보고, 이를 역산하여 겐토쿠 원년(1329년)으로 추정했다.[1]

일본사 연구자 스즈키 오리에에 따르면, 당시 중궁 선지는 혼인이 금지되지 않았으며, 결혼 후에도 계속 일하거나 출산 후 직무에 복귀하는 경우가 많았다.[3] 따라서 후지코는 고다이고 천황의 측실이 된 후에도, 정실인 중궁 기시를 모시는 필두 선지로서 계속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역사 이야기 『마스카가미』(14세기 중반)에서도 이후 장면에서 후지코는 "선지 삼위"로 등장한다.[4]

겐토쿠 2년(1330년) 9월 13일 밤에는 유력한 가인으로서 내리 삼수 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쇼카 와카슈』 225).[5]

2. 4. 겐코의 난

원덕 3년(1331년)에 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 사이의 전투인 겐코의 난이 시작되었다. 카사기 산 전투에서 패배한 고다이고 천황은 겐코 2년/쇼케이 원년(1332년) 3월에 오키 섬으로 유배되었다.

14세기 중반에 쓰인 역사 이야기 『마스카가미』에는 니조 후지코가 "쿠메의 사라산"이라는 이름으로 "미야의 선지" 혹은 "선지 삼위"로 등장한다. 『마스카가미』에서 오키 섬으로 유배된 고다이고 천황의 가족과 관련하여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인물은 중궁 사이온지 키시이며, 그다음은 아노 렌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황자 츠네나가 친왕이다. 후지코는 이들 다음, 세 번째로 언급된다.

『마스카가미』에 따르면, 이 시점까지 후지코는 종삼위에 서위되어 있었다(정규적인 비로 말하면, 중궁 다음의 뇨고에 상당하는 위계). 후지코의 아들인 카네나가 친왕은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중 한 명인 공경 카잔인 모로카타를 보좌역으로 하여 소중하게 길러졌다. 그러나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이 유배되자 카네나가 친왕은 남들의 눈을 피해 슬픔에 잠겼고, 후지코 또한 세상의 괴로움을 한탄하며 출가하여 불문에 귀의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후지코의 친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도 그녀의 슬픔을 더했다. 참고로, 후지코가 모시던 주군인 사이온지 키시 역시 같은 시기에 출가했는데, 이는 헤이안 시대 이래로 중궁을 모시는 뇨고나 뇨보 등이 주군을 따라 출가하는 관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마스카가미』에는 후지코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하위 신분의 뇨보(궁녀)로부터 조문 편지가 도착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뇨보는 "우키니마타 카사네루 유메오 키키나가라 오도로카사데모 나게키키시카나"(슬픈 소식을 들었지만, 조문하면 오히려 당신의 슬픔이 더 깊어질까 염려되어 혼자 슬퍼하고 있었습니다)라는 내용의 노래를 보내왔다. 이러한 변명 섞인 태도에 와카(和歌)에 능했던 후지코는 노래의 마지막 여섯 글자만 바꾸어 "우키니마타 카사네루 유메오 키키나가라 오도로카사데와 나도 나게키켄"(슬픈 소식을 들었으면서, 어찌하여 조문도 하지 않고 슬퍼만 하고 있었는가?)이라고 답가를 보내 질책했다고 전해진다.

2. 5. 가네요시와의 이별

겐코의 난 (1331년 - 1333년)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 (1333년 - 1336년)을 시작했다. 그러나 후지코가 모시던 사이온지 기시는 신정 시작 불과 몇 달 후인 겐코 3년 (1333년) 10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7] 게다가 겐무의 난 (1336년)에서 고다이고 천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배하여 겐무 정권은 무너졌다. 이후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옮겨가 남조를 열었고, 이로써 남북조 내란 (1336년 - 1392년)이 시작되었다.

가네요시 친왕엔겐 3년/랴쿠오 원년 (1338년) 9월 18일,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어 규슈로 파견되었다. 당시 가네요시 친왕의 나이는 10세 정도로 추정된다. 이것이 후지코와 아들 가네요시 친왕의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이듬해인 엔겐 4년/랴쿠오 2년 8월 16일 (1339년 9월 19일), 고다이고 천황이 붕어했다.

그 후 후지코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20세기 초의 역사 연구자 후지타 아키라는 후지코가 남조에 합류하지 않고 교토의 어느 사찰에 머물면서,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과 규슈로 떠난 아들 가네요시 친왕의 안녕을 빌며 여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2. 6. 사세의 노래

쇼헤이 6년/간오 2년(1351년) 봄, 후지코는 병으로 인해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8]. 음력 3월 20일 경(율리우스력 4월 20일 전후), 뜰에 늦게 핀 벚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사세의 노래를 읊었다[8].

: 병이 깊어지는 가운데 맞이한 봄, 3월 20일을 넘어서 뜰의 꽃이 늦게 피어나는 것을 보고 읊다

: '''마침 이때에 마음을 다하여 기다릴 수 없다면 올해의 벚꽃은 볼 수 있었으리'''[8]

:: —종삼위 후지코, 신센자이 와카슈 잡상・1691

이 노래에서 "마음을 다한다(心をつくし)"는 표현은 '고민(心尽くし)'과 '마음(心)', 그리고 아들 가네나가 친왕이 있는 '쓰쿠시(筑紫)'(후쿠오카현 혹은 규슈 전체)를 연결하는 가케코토바이다. 즉,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규슈에서 분투하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이를 근거로 후지코를 "상냥한 마음씨를 가진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며칠 뒤인 3월 29일(1351년 4월 25일), 후지코는 훙거했다[8]. 정확한 향년은 알 수 없으나 52세 이상이었으며, 당시 아들 가네나가는 23세 정도로 추정된다.

2. 7. 사후

10세 무렵 부모와 헤어진 가네요시 친왕은 평생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과 어머니 니조 후지코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했다.

쇼헤이 24년(1369년)에 가네요시 친왕은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의 31주기를 맞아 법화경 대팔권을 이와시미즈 하치만구에 봉납했다(도쿠가와 미술관 소장). 이 무렵 가네요시 친왕은 규슈의 중심지 다자이후를 장악하며 세력의 최성기를 맞았고, 겐토쿠 2년(1371년)에는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372년 무로마치 막부의 장수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에게 다자이후를 빼앗기면서 30년 넘게 유지해 온 세이세이 쇼군부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가네요시 친왕은 텐주 4년(1378년) 3월 29일, 어머니 니조 후지코(법명 레이쇼인 제니)의 28주기를 맞아 『범망경』을 직접 필사하여 진언율종 사찰인 도묘지(사가현 간자키군 요시노가리정 소재)에 납입했다. 당시 그는 지쿠고국 야베(후쿠오카현 야메시 야베) 산간 지역으로 피신해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어머니에 대한 공양을 잊지 않았다.

코와 원년(1381년)에는 어머니의 31주기를 기려 묘켄지(구마모토현 야쓰시로시 묘켄초 소재 절터)에 보협인탑을 세웠다. 이 석탑은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다이쇼 5년(1916년) 우물을 파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보협인탑은 가네요시 친왕이 남긴 마지막 기록으로 여겨지며,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탑에 새겨진 글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한 가네요시 친왕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고 평가했다.

일반적으로 가네요시 친왕은 보협인탑을 세운 2년 뒤인 1383년경 향년 55세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어머니를 위한 보협인탑 봉납을 마지막으로 가네요시 친왕은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시 묘켄초에 있는 고신지에는 고다이고 천황과 니조 후지코 두 사람을 기리는 영패(위패)가 보존되어 있다. 영패 앞면에는 각각 "등하후다이고 천황(等下後醍醐天皇)", "천화령조원선정니(天化靈照院禪定尼)"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붕어일인 "엔겐(延元) 4년(1339년) 8월 16일"과 함께 니조 후지코의 사망일인 "쇼헤이(正平) 6년(1351년) 3월 29일 입멸(入滅)"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니조 후지코가 사망한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신지는 가네요시 친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기도 하여, 아버지 고다이고 천황, 어머니 니조 후지코, 아들 가네요시 친왕 세 사람이 함께 공양되고 있다.

3. 인물

니조 후지코(藤原藤子|후지와라 후지코일본어)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활동한 고다이고 천황의 측실이자 가인(歌人)이다. 『존비분맥』, 『본조황윤소운록』, 『속습유화가집』 등 여러 문헌에서 권대납언국(権大納言局), 중궁선지(中宮宣旨)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법명은 영조원선정니(永祚院禅定尼)이다.

그녀는 『속천재화가집』 이하 여러 칙찬화가집에 와카(和歌)가 수록된 칙찬가인으로, 상당한 시적 역량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여러 자료를 비교 검토하여 그녀가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가네나가 친왕의 어머니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본조황윤소운록』, 『증경』 등의 기록과 와카 작품 비교를 통해 뒷받침된다.

3. 1. 이름

정식 이름은 藤原藤子|후지와라 후지코일본어이다. 그 외 다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름출처
권대납언국『존비분맥』
권대납언 삼위국『본조황윤소운록』
중궁선지『속습유화가집』・『습유현조화가집』
궁의 선지『증경』
선지 삼위『증경』
종삼위 후지코『신습유화가집』 등



법명은 영조원선정니(永祚院禅定尼)이다.

3. 2. 칙찬가인

칙찬가인으로서 『속천재화가집』 이하의 칙찬화가집에 8수가 수록되었다. 이 외에, 『습유현모화가집』, 『속현엽화가집』, 『송화화가집』, 『임영화가집』 등에도 와카가 선정되었다.

일본사 연구자인 모리 시게아키는 현존하는 와카를 통해 후지코의 시적 역량이 상당하다고 평가했다.

3. 3. 가네요시 친왕의 어머니 비정(比定)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가네나가 친왕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여러 자료에서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여러 자료를 비교 검토하여 가네나가 친왕의 어머니가 니조파의 가인(歌人) 니조 후지코라고 주장했다. 이는 1996년 일본 문학 연구자 오가와 타케오가 간략하게 제시했던 설을 모리가 상세히 논증한 것으로, 모리는 오가와의 지적을 중요한 논거 중 하나로 삼아 연구를 심화했다.

가네나가 친왕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계도류에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군서유종』 판 『본조황윤소운록』에 기록된 니조 타메미치의 딸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존비분맥』에 기록된 니조 타메요(타메미치의 아버지)의 딸 니조 타메코라는 설이다. 그러나 타메코는 1310년대에 이미 사망했으므로, 겐토쿠 원년(1329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가네나가 친왕의 어머니일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가네나가 친왕의 어머니는 니조 타메미치의 딸로 좁혀진다.

『본조황윤소운록』에는 가네나가 친왕으로 보이는 인물에 대해 "황자[아소 궁/어머니 동법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가네나가 친왕의 어머니가 호닌 법친왕과 같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호닌 법친왕 항목에는 "어머니 권대납언 삼위국, 타메미치 조정 여(権大納言為定卿女)"라고 되어 있어, 두 황자의 어머니가 니조 타메미치의 딸임을 시사한다.

또한, 와카집 『증경』 「봄의 이별(春部離別)」 편에는 "니조 타메사다의 형제", 즉 니조 타메미치의 적자인 타메사다의 누이 중 한 명이 중궁(사이온지 키시)를 모시는 "선지(宣旨)"로서 고다이고 천황의 총애를 받아 황자(와카미야)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황자는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인 카잔인 모로카타(화산원사현, 문정공)가 유모(교육 담당)로서 소중히 길렀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고다이고 천황의 측실이었던 니조 타메미치의 딸이 "중궁 선지"라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중궁 선지"가 "종삼위 후지코"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와카 비교를 통해 확인된다. 고다이고 천황 재위 중인 겐코 2년(1322년) 3월 1일에 성립된 『습유현조화가집(拾遺現藻和歌集)』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거짓말 같은 나뭇잎까지는 믿어도, 약속하지 않은 저녁은 기다릴 수 없는 것인가. 중궁 선지(中宮宣旨)"라는 와카가 수록되어 있다. 이와 동일한 와카가 고다이고 천황 사후에 편찬된 칙선 와카집 『신습유화가집』(쇼헤이 19년/죠지 3년, 1364년)에는 "(서사 없음). 거짓말 같은 나뭇잎까지는 믿어도 약속하지 않은 저녁은 기다릴 수 없는가. 종삼위 후지코(従三位藤子)"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따라서 고다이고 천황 시절 "중궁 선지"였던 인물은 후대에 "종삼위 후지코"로 불린 인물과 동일하다.

이상의 논증을 종합하면, 가네나가 친왕의 어머니 = 권대납언 삼위국(호닌 법친왕의 어머니) = 니조 타메미치의 딸 = 중궁 선지 = 종삼위 후지코 = 니조 후지코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참조

[1] Kotobank 二条為定 2020-07-18
[2] URL https://jpsearch.go.[...]
[3] URL https://jpsearch.go.[...]
[4] 서적 国史大辞典 吉川弘文館
[5] Kotobank 昭訓門院春日 2020-07-09
[6] URL https://jpsearch.go.[...]
[7] 기타 大日本史料 6編1冊243頁 https://clioimg.hi.u[...]
[8] URL https://jpsearch.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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